김우중 대우그룹 창업주
신문배달 소년에서 재계 2위 회장까지
파산까지 맞았던 일대기 조명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때 대구에서 피난 시절을 보낸 중학생 김 모 군은 서문시장에서 신문배달을 했다.
맨 먼저 배달소에 도착하는 김군은 다른 소년들이 오기 전에 냅다 시장바닥을 달렸다. 그러나 얼마 돌리기도 전에, 배달소년들이 몰려와 독점 시간이 적었다. 고안 끝에 그는 돈을 안 받고 신문을 마구 뿌렸다.
신문을 다 돌린 뒤, 돌아오면서 신문값을 받았다. 물론 일부는 떼였지만, 수익은 더 많았다. 얼마 안 가 서문시장 신문팔이 소년은 김군만 남았다.
영석한 머리로 연세대학교 경제학과에 진학한 김군은 장학금으로 학교를 다니며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유학을 준비 중이던 김군은 장학금을 준 한성실업의 근무 제안을 수락했다. 장학금의 은혜를 갚기 위한 겸 유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무역 관련 업무를 배우게 됐는데, 마치 회사 주인처럼 “내 일을 내가 알아서 처리했으며, 누군가 내게 명령하거나 시키기 전에 일거리를 찾아다니며 했다”고 자부하곤 했다.
결국 3년차가 되던 해에 김군은 국내 최초로 섬유제품 직수출을 성사시킨다. 당시 한성실업은 원사와 파나마모자, 타이어, 설탕 등 온갖 상품들을 들여오는 수입상이었다.
비상한 능력을 가진 김군의 정체는 훗날 대우그룹 창업주가 되는 김우중 회장이다.
1967년 3월 김우중은 500만원의 자본금과 5명의 직원으로 대우실업을 창업한다. 첫해부터 싱가포르에 트리코트 원단과 제품을 수출해 58만달러 규모의 수출실적을 올렸고 이후 인도네시아, 미국 등지로 시장을 넓혀 큰 성공을 거뒀다.
트리코트 원단과 와이셔츠 수출로 대우그룹 축성의 종잣돈을 마련한 김 회장에겐 ‘트리코트 김’이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또 직접 샘플 원단을 들고 대우의 첫 브랜드인 ‘영타이거’를 알렸던 그는 동남아에서 ‘타이거 킴’으로도 이름을 알렸다. 김우중 회장은 ‘대우신화’라는 신조어와 함께 샐러리맨들의 우상으로 떠올랐다.
대우실업은 1968년 수출 성과로 대통령 표창을 받으며 성장 가도를 달렸다. 1969년 한국 기업 최초로 호주 시드니에 해외 지사를 세웠고, 1975년 한국의 종합상사 시대를 연 이후 김 전 회장이 이끈 대우는 국내 중소기업의 수출창구로 발돋움했다.
1973년에는 영진토건을 인수해 대우개발로 간판을 바꿔 달고 무역부문인 대우실업과 합쳐 그룹의 모기업격인 ㈜대우를 출범시켰다.
김우중 회장은 1980~90년대에도 ‘세계경영’에 매진했다. 1980년대 무역·건설부문을 통합해 ㈜대우를 설립(1982년)하고 그룹화의 길에 들어선 후, 자동차·중공업·조선·전자·통신·정보시스템·금융·호텔·서비스 등 전 산업의 내실을 갖춰 세계진출을 본격화했다.
1990년대엔 동유럽의 몰락을 계기로 폴란드와 헝가리, 루마니아, 우즈베키스탄 등지에서 자동차공장 등을 인수하거나 설립하며 ‘신흥국 출신 최대의 다국적기업’으로 대우를 성장시켰다.
대우는 1998년말에는 396개 현지법인을 포함해 해외 네트워크가 모두 589곳에 달했고 해외고용 인력은 15만2000명을 기록했다. 이 당시 대우의 수출규모는 한국 총 수출액의 약 14%에 달하기도 했다.
그러나 1997년 11월 불어닥친 외환위기는 세계경영 신화 몰락의 시작이었다.
공격적인 사업 확장의 결과 기업의 재무 상황이 나빠지자, 김 회장은 분식회계와 또 다른 대규모 차입으로 이를 모면하려고 했다.
외환위기 이후 삼성, 현대 등이 뼈를 깎는 구조조정으로 부채를 줄일 때 대우는 오히려 빚을 더 늘렸다. 대우의 차입금은 1997년말 29조 원에서 1998년말 44조 원으로 15조 원이 늘었다. IMF 외환위기 직후 고금리 상황에서 차입금 증가는 치명적이었다.
1998년에 대우가 내는 이자비용은 6조 원에 달했다. 여기에 분식회계 사실까지 드러나면서 1999년 대우그룹은 해체됐다. 그리고 대우의 모든 계열사는 워크아웃(기업회생)에 들어갔다.
대우로 인한 전체 손실액은 31조 원에 이르렀고, 이를 메우기 위해 사실상 세금인 21조 원의 공적 자금이 투입됐다
이후 분식회계를 주도한 혐의로 2006년 징역 8년 6개월과 벌금 1000만원, 추징금 17조9000원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2008년 1월 특별 사면됐다.
2018년 대우 창업 51주년 기념행사에 모습을 드러낸 걸 끝으로 2019년 12월 향년 83세로 별세했다.
김우중 회장은 생전 개척자이자, 일중독자, 승부사 등으로 평가받는다.
창업 10년 만에 현대와 삼성, LG의 뒤를 이어 재계 4위에 올랐고 1998년엔 대우를 재계 서열 2위 대기업으로 성장시켰다.
1977년 대우그룹에 사원으로 입사해 2000년까지 구조조정본부장을 지낸 김우일 대우 M&A 대표는 입사 당시 사훈이 ‘도전, 창조, 그리고 희생’이었다며 대우는 별 보고 출근해서 별 보고 퇴근하는 곳으로 유명했다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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